*브금만큼 귀여운 글은 아니고 뒷이야기 있음.
성시경 - 그대와 춤을 ▶ ■
나는 윤민형을 좋아한다. 민형은 인간이 좀 살갑다기 보다는 과묵한 편이어서 친해질 기회는 별로 없었다. 맨날 무감한 표정이라 싸가지 없어 보이지나 않으면 다행인 얼굴이다. 나는 원래 그런 식으로 조용하고 무서운 사람을 어려워 한다. 실제로도 안 친하다. 어쩌다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것에 이것저것 덧씌우게 되고… 그렇게 내 취향에 맞게 재구성한 윤민형을 좋아했다.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할 자신 확신 의욕 기타 등등이 부족이라 그렇다. 확신 없는 고백은 무례함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당해봐서 안다) 그냥 이렇게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사이로 졸업하지 싶었다. 분명 그랬는데…
“좋아해.”
“…”
“미안. 무시해도 돼. 무시해.”
“선배, 잠깐…”
“갈게.”
“선배.”
“아, 나 다음 학기부터 CPA 준비하느라 휴학해서 마주칠 일 별로 없을 거야. 하여튼, 진짜 안녕. 미안.”
엘리베이터 코 앞에 두고 계단으로 뛰다시피 내려갔다.두 층 정도 내려오고 나서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 묻고 숨 몰아 쉬니까 좀 살겠어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비친 건 당황한 표정이었는데 일 년을 좋아하면서 그런 얼굴은 또 처음이라 어딘가에 턱 걸린 것처럼 잘 안 내려갔다.
고백할 생각은 정말로 없었다. 근데 다음 학기 휴학하고 CPA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났더니… 나도 모르게 경영관 테라스에서 애 무감한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뭔데 현실감 개뿔도 없어서 꿈인줄 알았잖아. 차라리 너한테 관심있는 친구가 있다고 애인 있냐고 떠보기나 했으면 몰라 단둘이 마주보고 서있으니까 입이 뇌의 명령을 안 듣고 따로 놀았다. 얘 왼쪽 볼에 점 있었구나 하는 가벼운 생각은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쪼그린 자세 그대로 머리나 퍽퍽 친다. 이것도… 타이밍이 늦었네… 인생…
*
며칠은 생각이 안 났다. 과제 하고 퀴즈 공부하고 스위치로 게임 하고 유튜브 보고 했더니 시간이 금방 갔다. 사실 일부러 그런 게 맞다. 과방에서 한 번 마주칠 뻔 했는데 다행히 내가 먼저 봐서 피했다. 학식 먹을 때도 신경 곤두세워야 해서 귀찮다는 걸 제외하면 달라진 건… 없다.
저녁 먹은 거 설거지까지 하고 침대에 기대서 게임 하는데 갑자기 상단바에 카톡 알림이 울렸다. 읽자마자 손가락이 삐끗했다. 달리던 캐릭터가 그대로 불구덩이로 떨어진다. 불구덩이로 떨어진 게 캐릭터가 아니라 본인 같다는 느낌이. 진작 차단할 걸…
-선배 잠깐 뵐 수 있을까요
-할 말 있어서요
신입생 때야 이런 상황에 울었겠지만 이젠 이런 거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안다. 기분 좀 잡칠 뿐이지.일단 카톡 최대한 신경 안 쓰기 위해 게임을 몇 판 더 하다가… 시간이 26분 지난 걸 확인하고 채팅창에 들어가서 메시지 보냈다. 물론 구라다.
-응 내가 시간될 때 연락 할게
*
지가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은 안 했다. 할 리가 없다. 이대로 얼굴 안 보는 줄 알았는데…
“연락 하신다더니.”
“그러게.”
“지금은 바빠요? 시간 많이 안 뺏을게요. 잠깐만.”
경영관에서 마주쳤다. 수업 다 끝날 시간인 여섯 시라 빼도박도 못 하게. 이쯤 되면 애초에 내가 경영 복전을 한 게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씨발 그렇다고 내가 취업을 안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빡침을 억누르면서 길게 얘기하는 윤민형은 처음이라 도주의 욕구가 강해졌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할 말 있다면서. 편하게 해.”
사실 이땐 좀 빡쳤다.
“… 술 마실래요?”
이 미친 새끼가? 술 마시잔 얘기 듣자마자 제정신 아니라고 윤민형을 속으로 좀 씹었다. 진짜로 뭐하는 새끼지. 근데 정신 차려 보니까 칵테일바. 단둘이 나란히 앉아서 침묵의 음주를 했다. 할 말 있다고 불러놓고선 밍기적거리는 걸 재촉은 왜 못 했냐면 이쪽도 찔리는 게 좀 있어서.
*
하여튼 그렇게 칵테일 마시고 2차로 맥주집까지 갔다가 눈 떠보니 집이었다. 할 말은 못 들었다. 그 할 말이라는 게 지가 밥 주는 길고양이 얘긴 아닐 거 아냐. (의외긴 했다)
잘 됐지. 반만 뜬 눈으로 핸드폰 켜서 연락처부터 지웠다. 안 궁금하다. 들어봤자 좋은 일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 지 않은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어쩔 거야. 이대로 덮으면 된다. 고백할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어지러운 머리에 쓰린 속으로 잠 깨자마자 이런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좀 꿈인 것 같기도 하다.
개빡친 것과는 별개로 주말이라 안 일어나고 더 잤다. 핸드폰이 울렸을 때 깼는데 알람인 줄 알았더니 전화다. 모르는 번호.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ㅆ…”
-… 네?
“아냐. 어우, 너인지 몰라서.”
-
“왜 전화했어?”
진짜… 미쳤나? 번호 지워놨더니 전화를 해? 그저께 알바 면접 봤던 카페 연락인줄 알고 받았다가 웬 날벼락이. 쌍시옷 뒤에 모음까지 붙기 전에 용케 입 닫았으니 다행이지.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선배, 제 번호…
“아니! … 있어. 있는데 이름을 못 보고 받아서.”
-괜찮으세요?
“어.”
-다행이네요.
웬 5자 토크세요. 자다 깨서 머리 안 돌아가는 바람에 대꾸할 말도 없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 건지 말이 또 나온다.
-나오실래요? 그냥, 해장 간단하게.
아 이 새끼 또 지랄하네… 감상은 그랬다. 좋아했던 걸 후회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걸 안 도와준다. 그러다가도 심장이 몹시 세게 뛰어서 자다 일어난 얼굴을 사람 꼴로 만드려면 몇 분이나 걸릴지 계산이나 하는 거다.
*
자존심 내려놓고 보면 눈치 빠르고 잘 읽는 타입은 아니다. 그 와중에 윤민형은 또 속 알기 어려운 타입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게 잘 없다. 좋아하게 된 이유의 7할 정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려워서. 그 뒤로 밥 드셨냐 뭐하냐 다음주에 시간 되시냐 하는 연락이 대중 없이 왔다. 처음엔 주저하는 기색이 있더니 나중엔 그런 것도 없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의 표본이세요. 중의적인 의미에서 불편하단 티를 냈는데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안 먹혔다. 죄책감 2할 쪽팔림 2할 미안함 2할 그리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마음 4할 정도로 구성이 됐다.
그래서 그 뒤로 윤민형과 같이 마주앉아 먹은 메뉴 목록: 학식 초밥 젤라또 삼겹살 막걸리 돈부리 크로플 떡볶이 학식 학식 맥주 에그베네딕트 딤섬 에끌레어… 한 달 간 간헐적으로 이게 무슨 사이인지 인풋 아웃풋 뜯어보며 머리도 같이 쥐어뜯던 것과 상관 없이 관계는 담백하다.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토익 학원이랑 알바에 방해 되지 않는 선에서 만나긴 했다. 근데 진짜 딱 그 정도였고 푹 파이지 않은 나머지 부분에서의 할당량이 점점 늘어났다. 다른 과 사람 누구였으면 그냥 친해졌구나 하고 말았을 걸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포지션인데도 이미 을인 상황에서 상대방이 조용하니까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고백했다 차인 / 찬 사이 둘이 만나면서 이렇게까지 티 안 나기도 어려운데 윤민형이 그걸 해냅니다…
이쯤 해서 나도 의식적으로 생각을 그만 뒀다. 동기들이랑 밥 먹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취향의 얼굴 앞에 앉혀놓고 밥 먹는 값이라 치기로 했다. 밥 먹은 다음에 카페 가고 코노 가고 영화 본 건… 보너스. 과방에서도 혼자 헤드폰 끼고 구석에서 자거나 몹시 무료한 표정으로 핸드폰 게임하던 인상이 강했는데 의외로 본인 취향 공유하는 거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루는 현대미술 전시를 보고 오락실 가서 총 게임을 했다. 어느 날에는 과 동기들 얘기랑 옛날 만화 얘기로 하루 종일 웃다 헤어졌고 또 어느 날은 소개팅 삼프터 쯤 되는 것 같은 미묘한 침묵이…
“저녁은 뭐 먹으러 갈까요?”
“아… 잠깐만.”
“네.”
“나 저녁은 토익 숙제 해야 될 것 같은데.”
“데려다 줄게요.”
“아냐. 됐어.”
“아님 탐탐 갈래요? 나도 공부할 거 있어서.”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서 한 명은 책 꺼내고 한 명은 노트북을 꺼냈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타이핑 소리가 안 들리길래 고개 들었더니 턱 괴고 이쪽 빤히 쳐다보고 있다. 정말 여러 모로 안 도와준다. 눈 마주쳤는데도 안 놀란다. 눈썹 까딱거리더니 샤프 쥐고 있던 손등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며 공부하라는 입모양을 한다.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네…
*
수요일은 알바 없는 대신에 공강이 애매하게 길어서 과방 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용건이 있어서 간 건 아니었다. 과방 문 열자마자 하하 웃으면서 그대로 백스텝 밟아 나왔다. 맨날 가던 과방인데 왜 하필 오늘 구석에 바로 시선이 박혔는지. 아니 생각해 보면 바로 본 게 다행이지. 익숙한 검정색 후드티 뒤집어 쓴 채 소파에 몸 구기고 누워 얌전히 자고 있는 윤민형.
“왜?”
“먼저 들어가. 나 화장실 좀.”
화장실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에서 과방 가기 전에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일단 찬 거 마시고 정신이라도 차리려고 자판기에서 냅다 콜라를 뽑았다. 잘 마시지도 않는 걸. 그러고 보니 여긴 또 고백했던 데네… 앞뒤 없이 냅다 고백 지른 데에 대한 벌 치곤 가혹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까지 피할 일? 생각이 탄산처럼 브레이크 없이 오만 군데로 튄다. 한참 뒤 돌아간 과방에는 그새 잠 깬 윤민형의 반만 뜬 눈과 눌린 뒷머리가 있었고 눈 가는 걸 막느라 진 빠져서 자취방 들어가자마자 엎어져 잤다.
연애상담은 대부분 본인 욕 먹이는 거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이쯤 되니까 안 할 수가 없었다. 대학교 후배 좋아하는 걸 알고 있던 고등학교 친구 둘을 불러다 상황 보고를 했다.
“잘생겼어?”
“잘 모르겠는데. 그냥… 쫌 내 취향인 거지.”
“못생겼다고 안 하는 거 보니까 잘생겼나 본데.”
입술 안으로 말아문 이상한 표정으로 대놓고 놀린다. 고백 받고 나서 관심 생겼는데 전에 찬 것처럼 돼버려서 민망하니까 일단 썸 타려는 거 아닌가? 하는 대답을 얻었다. 흠 신빙성이 없진 않군. 그런 시그널이 하나도 없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 민형이 카톡 프로필에 본인 사진을 안 올려놔서 (인스타와 페북은 그냥 비어있다) 닮은 연예인으로 설명하려다가 주제가 요즘 인기가 많아진 모 아이돌 그룹으로 튀었고 그 뒤로는 나베에 소주 마시느라 연락 온 것도 몰랐다. 한 시쯤 술집 나오면서 확인했더니 카톡 몇 개와 부재중 전화 몇 개가 있었다. 뭔데. 콜백하기 좀 싫어지네…
“여보,”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엥?”
-지금 어딘데?
“나 친구 만났다가 이제 집 들어가는데. 왜? 무슨 일 있어?”
가방 뒤져서 에어팟을 꺼냈는데 건너편 목소리가 퍽 다급해서 귀에 꽂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든 채로 통화를 잇는다. 핸드폰과 귀 사이로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바람처럼 지나갔다.
-무슨 일 없죠. 걱정돼서.
“…”
-…
“아.”
-집 들어갔어요?
“어… 아니. 술집에서 나온지 얼마 안 돼 가지구.
-저 좀… 과했죠.
과함 안 과함 두 가지로 카테고리 나눠서 분류하면 윤민형은 후자다. 예민함의 가능성은 있어도 호들갑의 가능성은 없다. 인간이 찔러볼 구석 하나 없이 너무 건조해서 문제지. 근데 과하냐고 물어보네. 미안하단 말은 없는 것도 웃기다. 이게 지금 상황을 놓고 얘기하는 거라면 좀 과한 게 맞는 것도 같아서 대답을 안 했다. 딱히 대답 들으려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지 그 뒤로 집에 갈 때까지 통화가 이어졌고 고양이 유튜브 얘기를 하다 끊었다. |
|
